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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5)[오너비사-과거에서 온 편지]라멘을 라면으로 바꾼 남자'전중윤 삼양식품 회장'

[푸드투데이 = 조성윤기자] <편집자 주> 기업, 소비자, 국가까지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전 인류를 덮친 코로나19 대유형이 잠잠해지기가 무섭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장기전으로 돌입했고 튀르기예는 참혹한 지진을 이겨내는 중이다. 세계적인 경제둔화로 여기저기에서 신음소리가 들리고 있다. 오너의 성격과 자질, 상황, 운(運)기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인류사처럼 기업사도 일정한 주기가 있다. 이 세상에 없던 것, 혹은 익숙한 것에 혁신을 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형적인 것을 구체화시켜 유형적인 것으로 만들어 내야한다는 점에서 한국전쟁 직후나 고도화된 사회는 똑같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무엇보다 실물경제 회복이 절실한 상황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식품.유통기업으로 우뚝 선 기업의 오너들은 어떻게 회사를 일구어냈을까.  푸드투데이는 창간 21주년을 맞아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오너들의 메시지를 전한다.

 

 

남대문시장의 '꿀꿀이죽'에서 얻은 아이디어
전쟁이 끝난 직후, 굴지의 보험회사 사장이었던 전중윤은 남대문시장에서 ‘꿀꿀이죽’을 사먹기위해 장사진을 친 노동자들을 목격했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행렬에 동참한 전중윤은 한 숟가락 떠먹고 깜짝 놀랐다. 깨진 단추 조각과 담배꽁초까지 나왔다. 미군 기지에서 잔반으로 버린 음식을 가져다가 다시 끓였던 '꿀꿀이죽'을 사람들이 줄까지 서면서 사 먹고 있던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 미군이 버린 음식을 끓여 한끼를 때우는 비참한 모습을 본 전중윤은 식량난이 해결이 되지 못한다면 인간의 존엄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때 일본에서 먹었던 '라멘'을 떠올렸다. 50년대말 보험회사를 운영할 당시 일본에서 경영연수를 받은 그는 식량자급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국내 실정에서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라멘이 바다를 건너 '라면'이 되기까지
꿀꿀이죽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전중윤은 일본을 찾아갔다. 자체적으로 라면을 만들 기술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 라멘회사와 접촉하고 거절당한 끝에 겨우 일본 묘조(明星)식품의 오쿠이 기스요미((奥井清澄)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단도직입적이지만 진실된 태도로 도움을 요청하는 그에게 오쿠이 회장의 마음이 열렸다.

 

오쿠이 회장은 기술지원을 무료로 해주고 로열티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 당시 일본은 업체들간의 특허권과 상표 경쟁이 치열할때였지만 오쿠이 회장은 극비 사항이던 수프 배합까지 알려줬다.

 

 

라면, 이익 창출이 아닌 개발도상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다
전중윤은 1963년 9월, 삼양식품공업으로 성북구 하월곡동에 공장을 세워 국내 처음으로 라면을 생산한다. 당시 가격은 10원이었다. '꿀꿀이죽'이 5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10원이라는 가격은 매우 저렴한 것이었다.

 

오쿠이 사장 역시 "라면 값이 너무 저렴한 것 아니냐"는 물음에 그의 대답은 "식량난으로 어려운 한국에서 누구나 배부르게 먹으려면 그 정도의 양과 가격을 책정하는 해야하고 이윤이 목적이 아니다"였다.

 

그 시기 정부는 1965년부터 분식 장려정책을 실시했고, 라면은 저렴하고 간편하지만 영양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한끼 식사로 통하기 시작했다. 묘조식품의 수프 배합비율을 토대로 만들어진 초기 라면은 ‘닭고기’ 육수를 베이스였다.

 

하지만 전준용 회장은 마늘과 고춧가루를 애용하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라면 수프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1966년 삼양식품은 한국식 수프 개발에 돌입했고,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1966년부터는 240만 봉지의 판매고를 올리고 1970년대 접어들어 삼양식품의 매출액은 초창기대비 무려 300배 나 성장했다.

 

 

'애국자'에서 '장사치'로...억울한 절치부심의 시간
60%라는 점유율로 승승장구를 하면서 라면시장에서 1위를 지켰던 삼양라면의 운명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1989년 삼양라면에는 공업용 우지(牛脂)를 식품에 사용했으니 악덕 모리배라는 투서가 발단이었다.

 

이 사건으로 점유율은 10%까지 떨어지고 1000여명의 삼양식품 직원들이 실직했다. 악성투서 한 장으로부터 여론재판이 국민 영양식으로 오랫동안 추앙돼온 애국산업을 죄악으로 내몰았지만 라면인들은 유구무언이었다. 보건복지부가 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인체에 무해하다고 해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삼양라면은 101년 동안 고등법원, 대법원을 거치면서 ‘공업용 우지라면’이란 투서상 허물은 조작, 무죄라는 최종판결을 받았다. 최종 무죄판결을 받은 삼양식품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대신 절치부심(切齒腐心)을 선택한다. 겸손하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법정관리까지 들어갔던 삼양식품은 1998년 법원에 화의(和議)를 신청한 후 대부분의 자산을 매각해 다시 사업을 일궈냈다. 그리고 라면 경영 50주년을 계기로 은퇴했다.

 

삼양식품의 대관령 목장은 해발 1000m의 대관령에는 목장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전 회장은 손수 도끼와 톱을 들고 초지(草地)를 조성한 곳이다.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대관령에서 노년을 보낸 그는 2014년, 아흔 다섯의 나이로 대관령에 잠들었다.

 

 

우지라면의 고해(苦海)겪고 무죄를 받으며,
악법(惡法)도 법이라는 무서운 세상의 이치를 알았다.
눈물겨운 제2의 창업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절치부심'이었다.

 

예로부터 강원도가 태생인 사람은 암하노불(巖下老佛)이라 했다.
10년 동안 참고 견딘 시간을 돈으로 보상받아 무엇하랴.
긴 고통 끝에 악덕, 모리배라는 모략으로부터 벗어났으니 다행이 아닌가.

 

기업인이라면 과열되는 경쟁에 현혹되지 말고 잠시 물러선 후
조바심을 버리고 시장의 순리에 따르는 자세가 필요하다.

전중윤 1919-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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