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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과잉을 조장하는 식품업계

1990년대 초반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오랜 작업 끝에 '식품 가이드 피라미드'를 제시했다.

  
하루의 권장 섭취량을 기준으로 빵, 시리얼, 밥, 파스타류를 맨 아래 놓고 그 위에 야채류와 과일류, 그 위에 유제품과 육류, 맨 꼭대기에는 섭취 자제 품목으로 지방과 단 것을 배치한 그림이었다.

  
일반 상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그림으로 보이지만 육류와 설탕업계는 곧바로 반발했다.

  
결국 농무부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피라미드의 적절성 여부를 검증하는 데 오랜 시간과 용역비를 투입해야 했고 업계는 "육류 소비를 줄이자"에서 "지방이 적은 고기를 선택한다"로 바꾸는 등 가이드라인 수정 사항을 '쟁취'했다.

  
먹거리가 얼마나 정치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매리얼 네슬 뉴욕대 교수가 쓴 책 '식품정치'는 소비자들의 건강을 담보로 한 식품회사들의 온갖 정치적 술수를 파헤친 책이다.

  
저자는 서두에서 "이 책의 집필 목적은 첫째, 식품 회사들이 우리의 식생활을 어느 정도까지 좌지우지하고 있는가를 밝히고 둘째, 식품 회사들의 마케팅 방법과 정치 시스템을 이용하는 관행에 대해 보다 폭넓은 비판적 논의를 이끌어 내려는 데 있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식품산업은 영양과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라는 부제대로 미국의 사례만을 다루고 있지만 우리나라 식품산업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

  
식품산업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업체들은 소비자들이 더 많이 먹도록 부추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단위 용량당 가격이 상대적으로 싼 대용량 제품이나 '곱빼기' 제품으로 단위 포장을 늘리고 광고 공세와 신제품 개발 등으로 '더 많이 먹기'를 조장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 관계자나 건강 전문가들을 상대로 한 로비나 캠페인으로 자사의 제품이 건강에 좋고 무해하다는 점도 강조한다.

  
어린 소비자들을 공략하기 위해 학교를 '매수'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탄산음료 회사와 학교가 계약을 맺고 교내 자판기와 학교 행사 등에 해당 제품만 사용하는 대신 회사는 학교에 계약금을 일시에 지급하고, 추가로 기부 등의 형태로 커미션을 제공하는 식이다.

  
이런 독점 계약은 웃지 못할 사태를 낳기도 했다. 조지아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자치회 후원으로 열린 '코카콜라의 날' 모임에서 펩시 로고가 새겨진 셔츠를 입고온 한 학생이 정학 당한 것이다.

  
이 책은 이밖에도 식품회사들의 막강한 정치 로비를 가능하게 하는 농무부의 회전문 인사, 비판을 차단하기 위한 식품회사들의 막무가내식 고소, 소비자를 기만하는 기능성 푸드의 실체 등을 속속들이 고발한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들이 온전히 우리의 선택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원제 'Food politics'


고려대학교출판부 펴냄 / 매리얼 네슬 지음 / 김정희 옮김 / 664쪽 / 2만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