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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하 삼양그룹 명예회장 영면...출생부터 타계까지 95년

[푸드투데이 = 황인선기자] 국내 대표 장수 기업인 삼양그룹을 이끌어 온 김상하 삼양그룹 명예회장이 20일 오후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95세.


고인은 삼양그룹 창업주 수당 김연수(1896~1979) 선생의 7남6녀 중 5남으로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1949년 졸업하고 삼양사에 입사했다. 입사 후 형님인 김상홍 명예회장(1923~2010)과 함께 부친을 모시며 정도경영과 중용을 실천해 오늘의 삼양을 만들었다.


고인은 1950~1960년대에 삼양사의 제당, 화섬 사업 진출을 위해 기술 도입을 추진하고 울산 제당 공장, 전주 폴리에스테르 공장의 건설 현장을 이끌었다. 고인은 삼양사 사장, 회장을 역임하면서 폴리에스테르 섬유 원료인 TPA,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전분 및 전분당 사업에 진출해 식품 및 화학 소재로 삼양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넓혔다. 1996년 그룹회장 취임을 전후해서는 패키징, 의약바이오 사업에 진출해 삼양의 미래 성장 동력도 준비했다.
 

고인은 경영에 매진하는 한편 2010년 양영재단, 수당재단, 하서학술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해 인재육성과 학문발전에 기여했다. 고인은 투병을 시작하기 전까지도 매일 종로구 연지동의 삼양그룹 본사로 출근해 재단 활동을 직접 챙기며 장학사업과 학문 발전에 애정을 쏟았다.


고인은 대한상공회의소장, 대한농구협회장,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한일경제협회장, 환경보전협회장을 비롯 최대 100여 개의 단체를 이끌며 경제, 체육, 환경, 문화 등 사회 전반의 발전에 헌신했다. 1988년 취임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12년간 재임해 최장수 회장으로 기록됐으며, 대한농구협회장도 1985년부터 12년간 맡아 한국 농구의 중흥을 이끌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동탑산업훈장(1975), 국민훈장 무궁화장(2003) 수훈을 비롯 자랑스런 전북인상(2008) 등을 수상했다.


고인은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구분하는 혜안으로 유명했다. 1990년대 국내 화섬업계가 신설, 증설에 경쟁적으로 나설 때 사업의 한계를 예상한 고인은 삼양사의 화섬사업 확대 중단을 선언했다. 훗날 외환 위기가 닥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고인의 혜안에 감탄했다. 고인은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인력구조조정을 추진하던 임원에게 기업 환경이 일시적으로 악화됐다고 직원들을 함부로 내보낼 수 없다며 인원감축을 백지화시키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내 박상례 여사와 아들 원(삼양사 부회장)씨, 정(삼양패키징 부회장)씨 등 2남이 있다. 고인의 유지를 따르고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조문을 비롯 조화, 부의금을 정중히 사양한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 발인은 22일 08시 20분이다. 

 

<김상하 삼양그룹 명예회장 일대기>


선친 수당의 가르침 계승, 산업보국과 중용 실천


김상하 삼양그룹 명예회장은 72년간 경영 현장을 누비며 우리 경제 발전뿐만 아니라 문화, 체육 등 사회 전반의 발전에 헌신했다.


삼양그룹 창업주 수당 김연수 선생(1896~1979)의 7남6녀 중 5남으로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명예회장은 1949년 8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삼양사에 입사했다. 이후 형님이자 ‘영원한 동지’ 김상홍 삼양그룹 명예회장(1923~2010)과 함께 부친을 모시며 정도경영과 중용을 실천해 오늘의 삼양을 만들었다.


김 명예회장은 부친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에 따라 산업보국을 근간으로 성실과 중용의 자세로 경영에 임했다. 산업보국 실천을 위해 김 명예회장은 제당, 화섬 사업 등에 진출하며 기술 개발과 인재 육성에 공을 기울였다. 이에 대한 김 명예회장의 생각은 2015년 발행한 회고록 ‘묵묵히 걸어온 길’에 잘 드러난다

 
“사업이란 제조업을 통해 산업보국을 실현해야 한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술개발과 인재 육성에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의 영속성이 위험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국가 경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것은 아버지가 사업을 바라보는 시각이었으며 나의 신조이기도 하다.”


김 명예회장은 2010년 양영재단, 수당재단, 하서학술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해 투병을 시작하기 전까지 삼양그룹의 연지동 본사로 출퇴근을 이어가며 장학사업과 학문 발전에 매진했다.


김 명예회장은 평생 경영을 통해 국민 의식주 해결과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이와 더불어 ‘분수를 지켜 복을 기르고(養福), 마음을 너그럽게 하며 욕망을 절제하여 기를 기르고(養氣), 낭비를 삼가 재를 기른다(養財)’는 ‘삼양훈’에 따라 과욕을 경계하고 극단을 멀리하며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일을 묵묵히 실천했다.

 
김 명예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장, 대한농구협회장,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한일경제협회장, 환경보전협회장을 비롯 최대 100여 개의 단체를 이끌며 경제, 체육, 환경, 문화 등 사회 전반의 발전에 헌신했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은 1988년 취임 이후 12년간 재임해 최장수 회장으로 기록됐으며, 대한농구협회장도 1985년부터 12년간 맡아 한국 농구의 중흥을 이끌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동탑산업훈장(1975), 국민훈장 무궁화장(2003) 수훈을 비롯 자랑스런 전북인상(2008) 등을 수상했다.


신규 사업 진출의 선봉, 기술도입과 공장 건설의 주역


김상하 명예회장은 삼양사가 신규 사업에 진출할 때마다 기술, 설비 도입과 공장 건설 등을 도맡으며 선봉에 섰다. 1952년 김 명예회장은 삼양의 제당사업 진출을 위해 일본 주재원으로 파견돼 제당 사업에 필요한 기술과 인력 확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귀국 후에는 울산 건설 현장의 군용 양철 슬레이트로 지은 간이 숙소에서 현장 근로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공사에 매진했다.


1968년 폴리에스테르 사업 진출 시에도 기술 도입과 공장 건설을 주도했다. 김 명예회장은 기계 및 기술 도입에 필요한 제반 업무를 이끌고 한 달 동안 연수생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기술 교육도 받았다. 김 명예회장은 1975년 삼양사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한 후에도 공장 증설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해 기술 개발과 설비 개선을 강조하고 치밀한 경영관리로 삼양사가 국내 최대 폴리에스테르 업체로 도약하는 데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폴리에스테르 사업을 본 궤도로 올린 80, 90년대에는 당시 첨단 소재로 각광받던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사업과 화학섬유의 원료인 TPA 사업에 진출해 섬유를 넘어 화학소재까지 사업 영역을 넓혔다. 이 당시의 결정으로 삼양의 화학소재 사업은 그룹을 대표하는 주력 사업으로 성장해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혜안의 리더십 발휘한 현장경영인


김상하 명예회장은 평생 중용의 정신으로 대국적 안목의 의사결정을 이뤘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정확히 구분하는 단호함으로 혜안의 리더십을 발휘한 대표적 사례가 화섬사업 확대 중단이다. 공급과잉 우려 속에서 국내 모든 업체가 경쟁적으로 신·증설을 추진하던 1990년대, 김상하 명예회장은 돌연 화섬사업 확대 중단을 선언했다. 심지어 신사업으로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폴리에스테르 필름 사업마저 철수했다. 이미 많은 투자가 진행됐지만 화섬산업의 한계를 미리 내다본 김 명예회장은 단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김 명예회장의 혜안이 증명됐다.


김상하 명예회장은 현장을 중시했다. 산업보국을 위해서는 제조업을 영위해야 하며 제조업의 근간은 ‘품질 좋은 물건을 생산해 적기에 공급한다’는 단순한 진리의 실천이라는 것이 김 명예회장의 지론이었다. 김 명예회장은 매달 한 번은 공장을 순회하며 ‘현장의 직원들이 삼양의 삶을 책임진다’고 격려했다. 특히, 김 명예회장은 항상 경영 환경이 어려운 사업장을 우선적으로 방문했다. 주변에서는 이를 ‘콩나물 시루를 돌보는 기질’이라 말했다. 웃자란 콩나물은 누르고, 덜 자란 콩나물에는 물 한 방울이라도 더 준다는 것이었다. 사업장을 돌아본 후에는 가능한 많은 직원들과 식사를 하며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고자 애썼다.

 
직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협의하는 문화는 창업주 시절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었다. 덕분에 상생과 상호신뢰를 기반으로 한 협력적인 노사관계는 삼양의 기업문화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철저한 계획과 실행으로 세심한 배려


김상하 명예회장은 철저하고 꼼꼼한 사전 준비로 유명했다. 또, 수립한 계획은 그대로 실행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정해진 일정은 반드시 소화하고 식사 메뉴처럼 사소한 것도 바꾸지 않았다. 이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에 기인한 바도 크다. 김 명예회장은 직원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한 후에는 음식의 맛이나 직원들의 반응을 일일이 확인하고 직원들이 좋아하면 더 없이 행복해했다. 이런 기질은 대한상공회의소장 재임 시절 국가를 대표하는 민간 경제사절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줬다.
 

철저한 계획 수립과 실행, 타인에 대한 배려는 커다란 책임감에서 비롯됐다. 김 명예회장은 “회사에서 나의 책임이 가장 크기 때문에 하루에 세 번씩 반성한다”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반면 일반 직원에게는 배려를 잃지 않았다.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을 검토하던 임원에게 “기업 환경이 일시적으로 악화됐다고 직원을 함부로 내보낼 수 없다. 오늘의 모든 책임을 직원들에게만 지게 할 수 없다”며 인원 감축을 백지화시키기도 했다.


장학재단 통한 인재육성과 성심을 다한 대외활동


김 명예회장은 선대부터 내려온 전통을 계승해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에 힘썼다. 선친인 수당 김연수 회장은 1939년 사재를 출연해 국내 최초의 민간장학재단인 양영재단을 설립했고 1968년에는 아들들과 함께 수당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을 확대했다.

 
생의 마지막까지 수당재단, 양영재단, 하서학술재단 이사장으로 일했던 김 명예회장은 선친의 유업을 계승해 재단 사업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전주, 울산, 여수 등 주요 공장 소재지의 지역사회에도 다양한 지원을 했다.


김상하 명예회장은 한때 100개가 넘는 단체의 회장직을 수행할 만큼 주어진 책임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1988년 취임한 대한상공회의소장은 연임을 거듭해 12년간 재임하며 최장수 회장으로 기록에 남았다. 김 명예회장은 대한상의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거의 매일을 상공회의소로 출근하며 우리나라 상공업 발전을 이끌고 민간경제외교 사절로 전 세계의 정치, 경제인들과 교류하며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이는 현직 경영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경우로 책임을 맡으면 무엇 하나 대충하지 않는 김 명예회장의 성품이 잘 드러난다. 대한농구협회장도 연임을 거듭해 85년부터 12년간 맡았다. 김 명예회장이 협회장으로 일하는 동안 한국 농구는 농구대잔치의 흥행과 프로 농구 출범 등으로 중흥기를 맞았다. 이외에도 한일경제협회장, 제2건국위원회 공동위원장, 환경보전협회장, 장묘문화개혁 범국민협의회장 등을 맡으며 문화, 체육 등 사회 전반의 발전에 성심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