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일선 기자 시절 총리실 출입기자를 세 번이나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겪은 총리가 무려 6명이나 된다. 노태우 정부 시절 정원식, 현승종 총리, 그리고 김영삼 정부 때 황인성, 이회창, 이홍구, 이수성 총리 등이 그들이다. 기억컨대 이들 중 소신껏, 그리고 일정한 권한을 갖고 국정에 임했던 총리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취재기자로서 직접 느낀 점과 다를 바 없이 대부분의 국민들도 우리나라의 국무총리는 권한도 없고 소신도 없이 그저 청와대 뒤치다꺼리나 하는 정도로 인식해온 것이 사실이다. 국민들의 이같은 인식을 불식시키려는 듯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8월 10일 의미 있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장기적인 |
과거 제왕적 대통령 체제하에서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능을 행사하던 시대는 지났다는 선언적 의미뿐만 아니라 이해찬 총리의 기용을 계기로 집권 2기의 국정운영은 ‘책임총리제’로 가겠다는 뜻을 담고 있어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과연 이해찬 총리가 다른 역대 총리와 달리 일정한 권한을 갖고 소신껏 국정운영을 총괄하는 ‘책임총리’ 역할을 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올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국정의 다른 분야까지는 파악할 수 없지만 식품행정에 관한 경우만 보더라도 이해찬 총리 역시 역대 총리와 다를 바 없이 아직은 ‘허수아비’ 총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최근 국무총리 국무조정실의 식품안전T/F는 늘 말로만 해오던 식품안전관리를 위한 행정체계 개편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마련했다. 이해찬 국무총리가 지난 9월 15일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에서 “식품안전T/F를 범부처적으로 구성해서 내년도 상반기까지 식품안전조직을 근본적으로 정비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국무조정실은 행정체계 개편방안을 마련하기에 앞서 개편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하고 외국의 식품안전행정체계와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의 식품안전관리체계 혁신방안 등을 참고하여 ‘식품안전행정체계 개편방향’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개편방향의 핵심내용은 ▲총리 소속의 식품전담기구인 ‘식품관리처’를 신설해 식품안전 정책기능을 총괄 수행토록하며 ▲집행업무에 있어서는 중앙은 위험이 높은 품목과 업소를 담당하고 지방은 기타 품목과 업소를 담당토록 기능을 조정하고 ▲식품 관련 업무만을 전담시키기 위해 의약품 관리업무는 복지부 소속의 의약품관리본부를 설치 운영토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같은 내용은 지금까지 나온 개편방향 중에서는 가장 혁신적일뿐만 아니라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지난 11월 12일, 국무조정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보고서는 청와대 정책담당 고위 관계자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VIP의 뜻”이라는 말 한마디로 묵살됐다고 한다.
필자는 이 소식을 접하고 두가지 측면에서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하나는 노무현 정부로부터는 식품행정의 혁신을 기대하기 힘들겠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공언한 ‘책임총리제’가 구호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크게 실망했다.
이해찬 총리가 지난 9월 15일 “내년도 상반기까지 식품안전조직을 근본적으로 정비하라”고 지시를 내리기까지 과정을 보면 나름대로 식품행정의 문제점과 대책에 대한 총리의 철학과 소신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국무조정실은 당초 ‘식품안전기본법’을 통해 식품안전관리 체계를 구축하려고 법안에 대한 공청회와 부처간 협의까지 마치고 해당부처인 복지부로 넘기려는 상황에서 이해찬 총리가 “법만 만들면 뭐 하는가, 근본적인 틀을 바꿔야지”라는 의견을 피력, 직원들이 힘을 받아 정부로서는 처음으로 대대적인 혁신방안을 내놓게 된 것이다.
그런데 ‘VIP의 생각’이 뭔지는 모르지만 총리의 소신과 철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혁신방안을 청와대가 충분한 검토 없이 묵살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총리의 지시에 의해 식품안전기본법의 국회 상정까지 보류한 채 근본적인 정비 방안을 만들어 낸 총리실 직원들이 청와대 관계자의 말 한마디에 맥없이 무너지는 총리의 ‘권위’를 볼 때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들 역시 국무총리를 과거 정권의 총리들처럼 ‘허수아비’ 총리로 생각하고 청와대 눈치만 보면서 복지부동이나 하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