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이 가고 여름이 초입에 들면 대나무밭은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전남 담양은 우리나라에서 대나무가 가장 많은 곳. 단정한 모범생 집단처럼 올곧은 대숲이지만 땅속은 사정이 달라 대나무 뿌리와 줄기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땅속줄기 마디마 디에서 땅 위로 돋아나는 어린순이 바로 ‘죽순’이다.
아이 손바닥만 한 것부터 어른 키만 한 것까지 길이도 제각각인 이 죽순은 5월 초순에서 6월 중순이 제철이다.
‘우후죽순(雨後竹筍).’이라는 말처럼 죽순은 성장이 무척 빨라 한 시간에 약 2~3cm가 자라 30~50일이면 성장이 끝난다. 이렇게 빨리 자라는 이유는 성장한 대나무에서 볼 수 있는 형질을 죽순이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죽순의 한 켜 한 켜가 땅속 수분과 영양분을 빨아들이면 마치 용수철 늘어나듯 동시에 자라 대나무의 마디가 되는 것이다.
죽순이라고 해서 다 캐는 것은 아니고, 대나무로 웃자라지 못할 작은 순만 캐서 음식 재료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맘때 바람 부는 날을 피해(채취할 때 바람이 들어가면 쉽게 굳는다) 대밭에서 캔 죽순은 은은한 향과 아삭아삭 씹는 맛이 일품이다. 껍질이 반질반질한, 길이가 30cm쯤 되는 죽순을 골라 캔 뒤 배추 포기 가르듯 밑동에 칼을 대고 서걱서걱 길이로 이등분하니 뽀얀 죽순 속살이 드러난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대나무의 종류는 70여 종이나 되지만 그중 식용이 가능한 것은 맹종죽(맹죽), 분죽(솜대), 왕죽(왕대)의 어린순이다. 5월 중순에 가장 먼저 나는 것은 맹종죽으로 겉껍질에 갈색 톤의 보릿빛이 돌며 아작아작 씹는 맛이 좋다.
5월 말에서 6월 초순에 나는 것은 분죽인데, 크기가 맹종죽보다 작고 색은 밝으며 맛은 순하고 쫀득해 죽순 중 최고로 친다. 6월 중순에 마지막으로 나는 것은 왕죽으로, 씹는 맛이 떨어진다.
죽순은 캐자마자 되도록 빨리 조리하든지 가공해야 한다. 죽순은 생장 중인 식물이어서 아미노산과 당류의 소비가 진행돼 시간이 흐르면 맛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염장 등의 방법으로 손질만 잘해두면 1년 내내 자연의 생생함을 즐길 수 있는 재료이다.
대나무밭이 많은 담양은 자연스레 죽순 요리가 발달해 죽순회, 죽계탕, 죽순된장찌개, 죽순제육주물럭, 죽순전, 대통밥, 댓잎술, 죽순주 등 다양한 죽순 별미를 맛볼 수 있다.
담양 대부분의 식당에서 취급하는 대통밥은 불린 쌀과 흑미, 대추, 은행, 밤, 잣 등을 대통에 넣고 찐 밥으로 고슬고슬하고 차지며 대나무 향취가 배어 있다.
대나무 통 속의 얇은 반투명 막인 ‘죽황’이 밥이 익는 동안 자연스럽게 배어들어 독특한 향을 내는 것이라서 대통밥을 짓는 대통은 단 한 번만 이용해야 한다. 죽황 성분은 체내의 열과 독을 없애준다고 한다.
이 대통밥은 대접에 덜어 여러 가지 나물과 토하젓을 넣고 비벼 먹어야 제 맛이다. 밥을 덜어낸 대통에는 댓잎차를 부어 마시고, 대통은 집에 가져가서 밥을 한 번 더 해 먹거나 연필꽂이로 이용하면 된다.
또한 커다란 대통에 영계와 쌀, 댓잎 분말, 한약재를 넣고 대나무 수액을 넣어 삶아낸 죽계탕은 대나무가 닭 기름을 빨아들여 살이 졸깃졸깃하고 담백한 맛이 난다.
담양의 어느 음식점을 가도 대표 메뉴는 단연코 죽순회다. 죽순과 우렁, 오이, 고추, 미나리 등을 초고추장에 무쳐낸 것인데, 초고추장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해 싱싱한 햇죽순의 향과 참맛을 가려버린 것이 아쉽다.
생죽순의 은은한 맛과 향을 즐기고 싶다면 강한 양념의 죽순회보다는 들깨 가루를 넣은 심심한 죽순볶음이 제격이다.
죽순은 맛도 좋지만 몸에도 좋다. 특유의 씹는 맛은 섬유질 때문인데, 이 섬유질에는 특수 효소가 함유돼 있어 장속의 유익한 균이 잘 자라도록 돕고 장의 연동운동을 촉진하므로 변비 해소나 숙변 제거에 효과적이다. 게다가 칼로리도 낮으니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강력 추천할 만하다.
혈중 콜레스테롤을 떨어뜨려 동맥경화를 예방하고, 칼륨이 체내에 있는 여분의 나트륨을 배출시켜 고혈압 환자에게 좋으며 이뇨 작용을 돕기도 한다.
또한 ‘동의보감’에 따르면 죽순은 맛이 달고 약간 찬 성질이 있기 때문에 번열과 갈증을 해소해주며 몸속의 체액이 순조롭게 순환하도록 해주고 원기 회복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여린 죽순에서부터 대나무는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다. 대나무 수액인 죽력수는 고로쇠보다 더 효능이 좋다고 알려져 있으며, 죽순은 고급 식재료로 인기가 높고, 나무와 잎은 죽세공품의 재료로 사용되며, 대나무숯은 참숯에 비해 효능이 네 배나 된다고 한다.
죽순은 ‘아침에 캔 것은 그날 안에 먹는다’ 라고 할 정도로 신선도가 중요한데, 캐낸 것을 바로 요리해야 하며, 날 것 상태로 저장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죽순은 시간이 지날수록 떫은맛이 강해지고, 수분이 줄어들며, 맛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제철이 아니고서는 죽순을 통조림으로 밖에 먹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죽순의 떫은맛을 없애려면 삶아서 껍질을 벗긴 뒤 하루 정도 맑은 물에 우려내야 하는데, 이때 쌀뜨물을 이용하면 더 효과적으로 떫은맛을 없앨 수 있다. 쌀에 들어있는 효소가 죽순의 산화를 억제하고 부드럽게 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