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말만으로는 잘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밥을 아무리 말로 잘 설명해 줄 수 있다 하더라도 밥 한 사발 실제로 먹이는 것보다 더 잘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아무리 수영에 대해 설명을 잘 들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물속에 들어가보지 못한 사람이 헤엄을 칠 수는 없다. 따라서 밥을 지어 먹여야 배고픈 사람을 살릴 수 있고 물에 들어가 헤엄쳐 보아야 비로소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도 이같이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중 하나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선수양의 마지막 단계는 거리에 나가 사람 속에 섞여 그들을 구제하는 자비로운 행동이라 했으며 기독교에서의 진실한 사랑이란 강도에게 부상당한 이방인을 치료해주고 보살펴 주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침을 받아 왔던가.
사랑에 대해 학교에서, 교회나 사찰에서, 가정에서 수없이 많은 설명을 들었으면서도 정작 사랑이 무엇인가는 느끼지 못하였던 것이 아닐까. 깨닫기 전에는 부처님의 팔만대장경으로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어도 깨닫기만 하면 성경에 나와있듯이 보물단지가 묻힌 밭을 발견한 농부처럼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면서 덩실덩실 춤추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하지만 불에 데어보지 못한 사람이 불을 느낄 수 없음 같이 사랑을 느껴본 일이 없는 사람이 진실한 사랑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진실한 사랑이 없는 관계는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사이가 가깝거나 멀어질 수 있다. 사랑이 없는 모든 인간관계는 수단으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23세 청년이 자기 친부모와 형제를 칼로 찔러서 살해한 사건이 있었는데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복면을 하였다지만 눈으로 알아본 아버지가 “그만하라”고 애원하는데도 무자비하게 난도질한 범인이 과연 독특한 별종이었던가. 혹시 사랑을 느껴보지 못해서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녀세대에게 부모와 가족은 단지 간섭과 제약과 귀찮음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두려운 세상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생존을 위한 경쟁이 격심해 질수록 부모가 느긋하게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사랑을 느끼게 해주기는 어렵다.
어렸을 때는 직장에서 바쁜 일로 아이들의 유소년기를 다 보내고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서는 엄청난 진학 스트레스로 청소년기를 다 보낸다. 그러면서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갑자기 이들을 옭아매던 규제가 한꺼번에 없어진다. 담배를 피워도 되고, 술집에 가도 되며 이성을 사귀어도 된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 돈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연히 돈의 소스인 부모를 조르거나 속이거나 하면서 부족한 용돈을 조달해 보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온갖 것을 알게 되고 모든 코스트를 알며 댓글을 통해 그 쾌감까지 알고 있다. 이 쯤되면 사랑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누가 이들에게 사랑을 알게 할 것인가. 부모인가 형제인가 선생님인가 목사나 승려인가. 누가 이들에게 사랑이야말로 자기 희생이 따르는 행동임을 느끼게 해서 궁극적으로 사랑이 몸에 배이게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우리가 언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여 사랑을 실천해 보았던가. 댓가를 바라면서 행한 자선이나 기복을 바라면서 행한 기부는 이미 희생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아이들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기르면서 베푼 것을 사랑이라고 자만한다면 이것 또한 큰 오산이다.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나보다 어려운 이웃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산 교육이 되어 불에 데어 불을 알듯이 그들로 하여금 사랑을 체험하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만이 악의 유혹을 이기게 해준다.
결국 부모들이 하는 자기 희생의 행동이 아이들 마음속에 사랑의 씨앗을 심게 되고 비로소 아이들은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말로서만 교육할 수 없다. 아이들 무서워 문 잠그고 자는 세상 맞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라도 행동을 통한 사랑교육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