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시절 한옥에 살아 '문종이'에 대한 추억이 있다. 증조할머니가 모친과 함께 월동에 앞서 늦가을 문짝을 떼어 '창호지'를 발라놓으면 손가락으로 뚫고 다니다 혼이 난 적이 있다. 요즘에는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녀석이 그런 장난을 치다 모친께 야단을 맞는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인가? 조히(종이), 조선종이, 창호지, 문종이, 참종이, 닥종이 등으로 불리던 우리 종이가 '한지(韓紙)'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초 중반으로 국내에 서양 종이 '양지(洋紙)'가 상륙, 주류를 이루면서부터다. 한지는 우리 민족상처럼 강인하고 부드러우며 깨끗할 뿐만 아니라 은은하고 정감이 있다. 또한 질감과 빛깔이 고와 책종이나 화구용으로 조상들의 예술혼을 담는 그릇이 되어 왔다. 한민족의 혼이 담긴 한지는 이 땅에 자라는 질 좋은 닥나무가 있었기때문에 가능했다. 한지는 질기고 수명이 길다는 것 외에도 보온성과 통풍성이 뛰어나다. 한지의 우수성은 양지와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지는 빛과 바 |
한지를 창호지로 쓰면 문을 닫아도 바람이 잘 통하고 습기를 잘 흡수, 습도 조절의 역할까지 한다. 그래서 한지를 흔히 '살아 있는 종이'라고도 한다. 반면 양지는 바람이 잘 통하지 않고 습기에 대한 친화력도 한지에 비해 떨어진다. 한지가 살아 숨쉬는 종이라면 양지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종이다.
한지는 주로 닥나무 껍질에서 뽑아낸 인피섬유를 원료로 하여 전통적 방법인 사람의 손으로 직접 뜬 수록지다. 양지는 나무 껍질에서 목질부를 가공해 만든 펄프를 원료로 하여 기계식으로 생산되는 종이다.
닥나무 인피섬유는 화학펄프로 사용하는 침엽수의 섬유길이(3㎜)나 활엽수의 섬유길이(1㎜)보다 훨씬 긴 섬유 길이(10㎜ 내외)를 가지고 있어서 목재 펄프에 비해 조직 자체의 강도가 뛰어나고 섬유의 결합도 강해 질긴 종이를 만들 수 있다. 한지가 강한 예는 몇 장을 겹쳐 바른 한지로 갑옷을 만든 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옻칠을 입힌 몇 겹의 한지로 만든 갑옷은 화살도 뚫지를 못한다고 한다.
한지의 수명이 양지에 비해 긴 또 다른 이유는 한지는 화학반응을 쉽게 하지 않는 중성지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신문지나 오래된 교과서가 누렇게 변색되는 이유는 사용된 펄프지가 산성지이기 때문이다.
즉 양지는 지료 pH 4.0 이하의 산성지로서 수명이 고작 50~100년 정도면 누렇게 황화현상을 일으키며 삭아버리는 데 비해, 한지는 지료 pH 9.0 이상의 중성지로서 세월이 가면 갈수록 결이 고와지고 수명이 길어진다.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두루마리(국보 제126호)의 제작 연대는 통일신라 시대로 704~751년. 자그마치 1200년 남짓을 좀벌레에 시달리면서도 두루마리 일부만 닳아 떨어졌을 뿐 그 형체는 온전하다. 석가탑 사리함 안 비단보에 싸여 있던 그 두루마리의 지질은 닥종이였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한지의 지질을 향상시킨 또 다른 요인은 식물성 풀에서 찾을 수 있다. 한지는 섬유질을 균등하게 분산시키기 위해 독특한 식물성 풀을 사용했다. 바로 닥풀이다. 닥풀은 주성분이 당류로서 뿌리에 점액이 많기 때문에 섬유가 빨리 가라앉지 않고 물 속에 고루 퍼지게 하여 종이를 뜰 때 섬유의 접착이 잘 되도록 한다. 특히 얇은 종이를 만드는 데 유리하고 순간적인 산화가 빨라 겹쳐진 젖은 종이를 떨어지기 쉽게 한다.
한지의 질을 더 높인 조상들의 비법은 또 있다. 한지 제조의 마무리 공정인 도침(搗砧)이 바로 그것이다. 도침은 종이 표면이 치밀해지고 광택이 나게 하기 위해 면풀칠한 종이를 여러 장씩 겹쳐 놓고 디딜방아 모양의 도침기로 골고루 내리치는 공정을 말한다. 이는 무명옷에 쌀풀을 먹여 다듬이질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이 도침기술은 우리 조상들이 세계 최초로 고안한 종이의 표면 가공기술이다.
이에 따라 한옥에 살다보면 창호지에 대한 고마움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독자들도 이 글을 읽으면 어린시절의 추억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 겨레의 과학슬기가 담긴 전통 한지는 최근 값싼 중국 한지제품과 원료에 밀려 정체성 위기를 맞고 있다. 한옥이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섬에 따라 창호지와 장판지는 유리와 비닐로 대치됐고, 한지는 안타깝게도 더욱 발붙일 곳을 잃어가고 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영인본이 소장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佛祖直指心體要節)>에 쓰인 우리의 종이. 천년의 세월을 견뎌낸 한지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대책을, 정부와 관련업계는 모색해 보아야겠다. <상하권중 하권만 전해지고 있는 직지 원본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