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홍 사장은 말수가 적다. 질문을 해도 짧막하게 대답할 뿐 이렇다할 수식어나 미사여구를 좀처럼 달지 않는다.
게다가 굵은 톤의 목소리에 짧은 헤어스타일을 고수해 얼핏 보면 한국인들이 마시는 소주 10병 중 5병 이상을 책임진 기업의 CEO라기 보다는 정장을 한 군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자신에 대한 PR도 할 줄 모르고 기자간담회때도 그저 "열심히 하겠으니 지켜봐달라"고 말할 뿐이다. 신제품 출시 설명회에서 경쟁사에 비해 자사의 우위를 강조하는 프리젠테이션이 나오자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때로는 수줍음을 타는 사람이기도 하다.
직원들에게 요새 어떤 이야기를 자주 하냐고 묻자 "제가 욕을 좀 합니다"라고 짧게 대답할 뿐이다. 대개 다른 CEO들이 블루오션 등 산업계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주제들을 거창하게 논하는 것과는 차별적이다.
취미 생활에 대해서도 무취미를 넘어서 "몰취미"라고 이야기하는게 전부이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려웠던 기억에 대해서도 "누구나 다 고비가 있는게 아니냐"고 짧게 반문한다.
이같이 모든 것에 무관심해보이고 무뚝뚝해보이는 그이지만 인생의 동반자격인 술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국내 소주 시장 맹주를 이끄는 수장이기 때문일까. 하 사장은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청탁불문'의 주량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소주로 시작하지만 주종은 가리지 않고 마신다고 한다.
하진홍 사장은 1949년 경남 진주 태생으로 경상대 농화학과, 서울대 대학원 식품공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에서 농학박사를 받았다.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직접 술을 만들어 먹을 정도로 알코올에 대한 애정이 컸기 때문일까. 그는 1972년 하이트의 전신인 조선맥주에 입사했다.
혹시 술이 좋아서 맥주회사에 입사한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대학원 논문을 마무리할 당시 전공을 살려 미생물 발효 부문에서 일자리를 얻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주도(酒道)를 걷게 된 배경 중에서 역시 술에 대한 사랑을 빼놓을 수는 없을 듯 하다. "회사 들어와서 맥주는 원없이 마셨다"고 자인하기 때문이다.
하 사장은 입사 초기에 대학에서 농화학, 대학원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한 경력 때문에 처음에는 R&D 부문에서 일했지만 현장 근무 경험을 얻기 위해 생산 및 영업직 등 경리직을 제외하고는 모든 업무를 두루 섭렵한 뒤 다시 전공분야인 R&D로 복귀하게 된다.
이후 '하이트 신화'를 일궈내는데 일조하면서 2001년 6월 하이트맥주 부사장을 거쳐 2003년 11월에는 생산담당 사장직에 오르게 된다.
이처럼 맥주맨으로서 화려한 길을 걸어온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인생 경로를 다소 수정하게 되는 계기가 찾아온다.
2005년 8월에 법정관리중이던 진로 인수기획단장을 맡기면서 소주맨으로 변신하도록 주문이 내려온 것이다.
맥주와 소주의 제조 과정이 틀리고 시장구조도 차별적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그는 결국 하이트가 진로 인수에 성공한 직후인 그해 9월에 진로 사장을 맡게 됐고 올해 8월에는 소주 시장 역사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소주 알코올 도수의 마지노선으로 일컬어지던 20도 벽을 허문 19.8도의 '참이슬 후레쉬'를 시장에 내놓으면서 소주의 독한 이미지를 부드럽고 깨끗한 술이라는 이미지로 바꿔놓은 것이다.
하 사장은 참이슬 후레쉬 출시 이후 영업장 방문 등 현장 경영에 활발히 나서는 동시에 임직원들을 독려하면서 소주맨으로서의 새로운 인생 살이에 여념이 없다.
그는 "참이슬 후레쉬 출시 이후 직원들이 모처럼만에 일할 맛이 난다고 하는 상황이며 모두가 열정을 가지고 업무에 매진할 수 있도록 임원들에게 강하게 주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 사장은 또 "갈 길을 가도록 이끌어 주는게 부하 직원들을 진정으로 위한 것이지 뒤처진 사람들을 감싸주는게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강조한다.
그는 향후 목표에 대해 "앞으로 법정관리의 후유증이 남아있는 진로를 탄탄한 반석위에 올려놓아 하이트-진로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라며 "연말까지 현안들이 대개 정리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보다 큰 욕심이 있다. 그는 직원들에게 진로의 사장으로서 보다는 같이 부대끼면서 동고동락했던 상사로 남고 싶다고 한다. 경영인으로서 일궈낸 성과도 중요하지만 함께 했던 좋은 사람으로 후배들에게 남고 싶다는 마음에서다.
주변 사람들은 하 사장에 대해 한결같이 시골 아낙네가 끓인 구수한 청국장 맛이 나는 사람이라고 한다. 무뚝뚝하면서도 담백해보이는 그가 앞으로 국내 소주 산업을 주도하는 경영인으로서 어떤 길을 걸어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