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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국제화와 공직자의 자세

김병조 편집국장
조선말기 흥선 대원군과 며느리 명성황후 사이에 벌어졌던 정치적 갈등과 권력 다툼은 유명한 일화다. 권력싸움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중요한 이유가 국가의 문호개방 여부를 둘러싼 정책과 철학의 차이 때문이었다.

주변국에 문호개방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대원군의 정책을 호국(護國)이라 하지 않고 쇄국(鎖國)정책으로 기록한 것을 보면 일단 역사는 대원군 편이 아니다.

대원군과 상반된 이미지로 연상되는 세계적인 인물로 구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있다. 고르바초프는 85년 3월 체르넨코의 사망으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자 개혁(페레스트로이카), 개방(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인물이다.
90년 3월에 소련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고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지만 91년 12월 보수강경파의 힘에 밀려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세계 역사는 그를 대단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지만 오늘날 러시아 국민들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조선말기 대원군과 소련말기 고르바초프라는 두 인물을 통해 개혁과 개방정책이 국가 명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대원군처럼 문을 걸어 잠그고 ‘우리 것’을 지키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인지, 아니면 고르바초프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을 포기하고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나가는 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명쾌한 정답은 없을 것이다.

당대의 역사적 기록과 후대의 역사적 평가는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쇄국을 고집하는 독재 권력자로 기록된 대원군이지만 후대 역사가들도 전적으로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세계 민주주의 국가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대접했던 고르바초프가 오늘날 춥고 배고픈 러시아 국민들로부터는 크게 추앙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촌은 지금 ‘세계화’, ‘국제화’라는 가면을 쓰고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미 경제적으로는 국경 없는 국가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도 95년 김영삼 정권 시절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함으로써 세계무역질서에 동참하고 있는 상황이다.

부존자원이 부족해 많은 원재료를 수입에 의존해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성장의 동인을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세계무역규범에 따르는 것이 득이 되는지 실이 되는지 계산하기가 복잡하다. 그러나 분명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을 비롯한 경제 강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무역질서가 절대적인 선이 아니며, 또한 자국의 이익을 쫓아가는 경제전쟁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대원군과 고르바초프를 거론하면서 오늘날 세계무역질서를 들먹이는 이유는 한 시대의 집권자와 공직자들이 개혁, 개방정책에 대해 어떤 철학과 역사적 인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국가의 명운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지엽적인 문제로 볼 수도 있지만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최근 식품업계에 우려할 만한 두 가지 사안이 벌어지고 있다. 우선 하나는 식품성분 표시를 둘러싼 정부와 업계간에 세워지고 있는 대립각(對立角)이다.

식약청이 가공식품에 들어가는 원재료 및 성분에 대해 100% 표시하도록 하겠다고 추진하자 업계가 크게 반발하고 있는 싸움이다. 식약청은 CODEX(국제식품규격위원회)의 권고사항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업계는 의무사항도 아닌데 권고사항을 굳이 앞서 지키려고 하는 것은 제품별 제조 노하우를 공개시키는 어리석은 짓이라며 담당 공무원에 대해 ‘매국노’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반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식품업계에는 우려할 만한 소식이 하나 발생했다.

‘ISO22000’으로 이름 붙여진 국제식품안전경영시스템이 내년부터 시행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ISO22000’이 시행되면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이를 수입 장벽의 무기로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식품업계로서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이미 WTO에 가입된 이상 세계무역질서에 따르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공직자들에게 주문하고 싶은 것은 무조건 세계질서에 따라가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느냐, 당장의 유 불리를 떠나 후대로부터 평가받을 수 있느냐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애국심을 발휘해주길 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