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학교 시절 자취집 주인 할아버지가 필자에게 가르쳐준 두 가지 교훈이 있다. 하나는 효(孝)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넘버원 주의’였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 하신 그 분은 “이 세상에 2등은 없다”라며 1등 철학을 유난히 강조했다. 노(老) 교육자의 영향 탓인지 타고난 천성 탓인지 줄곧 1등을 추구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학교 공부도 1등을 해야 직성이 풀리고 어떤 단체든 장을 맡아야 일하는 기분이 났다. 그러다 신문기자가 되면서 노조위원장을 하다가 해직의 아픔을 겪고 있을 때, 출입하던 모 은행의 홍보실장은 필자에게 “난세에는 2등이 영웅이다”며 ‘2등 철학’을 가르쳐 주었다. 가치관의 혼란을 겪었지만 1등만이 능사가 아니라 |
우리사회에는 1등만이 인정받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모두들 1등이 되려고 애를 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그러나 1등이 곧 성공이고 2등은 실패라는 등식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영원한 1등도 영원한 2등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1등보다 2등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2등은 1등을 할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상 정치생명이 가장 긴 김종필씨가 정계를 떠났다. 43년 동안 정치에 몸을 담고 영욕의 세월을 보냈지만 그는 한번도 1등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두고 ‘영원한 2인자’라고 칭한다. 대권의 꿈은 물론 사상 초유의 10선의원이라는 개인적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정계를 떠나는 그에게 ‘쓸쓸한 퇴장’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정치무대에서 1등을 한 적이 있는 다른 어떤 정치인보다도 영원한 2인자 역할만 한 김종필씨를 더 높게 평가하고 싶다.
대부분 아는 사실이지만 김종필씨는 낙천주의자다. 그리고 정치인이지만 미술 등 다방면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다. 한마디로 인생을 멋으로 사는 사람이다. 일부러 2인자 노릇만 했을 리는 없지만 2등에 만족할 줄 아는 철학이 없었다면, 또 2등의 가치를 몰랐다면 한 분야에서 43년이란 세월 동안 2등만 하면서 마음 편히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김종필씨를 성공한 정치인, 행복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싶다. 그의 2인자 정치인생 마감은 ‘쓸쓸한 퇴장’이 아니라 ‘화려한 퇴장’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어울릴 것이다. 그의 철학이 있는 2인자 노릇이 있었기에 빛나는 1등도 탄생했던 것이다. 2등이 없는 1등은 있을 수 없고 조연 없는 주연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식품업계에 보면 2등이 없는 경우가 많다. 1등만 있고 나머지는 5등만 존재하는 현상이 눈에 띈다. 김치산업 분야가 그렇고 라면 업계가 그렇다. 김치의 경우 두산 종가집 김치가 시장 점유율 70%로, 라면의 경우 농심 라면이 76%로 독주를 할 뿐 다른 업체들은 나머지 시장을 갖고 나눠 먹는 공동 5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1위 업체가 지나친 독주를 하는 것도 문제지만 5위 업체들이 1위 업체를 상대로 한 경쟁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2등에 대한 철학이 없고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경쟁 없인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2등이 있을 때만이 진정한 경쟁이 가능한 것이고 그래야 업계 전체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으며 1등의 가치도 더욱 빛나는 것이다. 1등을 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제대로 된 2등은 1등보다도 더 나은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제대로 된 2등이 없는 곳에서 1등을 해봐야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2등이 없는 김치와 라면 업계 등에 5등들의 분발로 제대로 된 2등이 등장해서 1등과 2등이 모두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