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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검스님의 사찰음식③> 하루 일하지 않으면 굶어라! 사찰음식은 걸식에서 시작

불교사찰에서 먹는 음식은 기본적으로 채식 위주이며 최근 음식으로 인한 비만과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는 음식문화와 식습관에서 불교 사찰음식은 다이어트 음식 식단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현대인들은 지나친 과식과 무절제한 식습관으로 체중이 늘고 몸이 비정상적으로 변형돼서 생활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에 푸드투데이는 동서고금의 불교지식에 해박한 보검스님을 통해 사찰음식에 대해 20편에 나눠 들어본다. 보검(이치란 박사)스님은 영국에서 유학을 했으며 현재 한국불교계의 국제 불교활동분야에서는 선두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석학이다.<편집자 주>

 

사찰음식은 걸식에서 시작됐다. 한국사찰음식은 중국 선종불교 사찰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사찰음식의 정신적 원천은 인도 부처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기원전 563년에 태어나서 483년에 열반에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이다. 

 

당시 인도에는 슈라마나(사문)라고 하는 유행승(遊行僧)들이 집을 떠나 노숙하면서 도를 닦는 것이 유행이었다. 사실, 이들은 못 먹고 못살아서 집을 나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세간의 지식으로는 인간존재의 근원과 우주 철리의 궁극적 실재를 알 수 없어서 요가를 하면서 조용히 명상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싯다르타 고오타마도 인간존재의 실상을 알고자 왕궁을 떠나서 6년간 고행(苦行)을 한 끝에 대각(大覺)을 성취하여 붇다(깨달은 자)가 되었다. 붇다(Buddha)를 중국에서 불타(佛陀)로 음차하여 표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처’라고 부르고, 존칭하여 ‘부처님’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뜻은 ‘깨달은 자’이다. 
  

부처님은 당시의 풍속대로 걸식을 했다. 다른 슈라마나(사문)들도 다 걸식을 했기 때문에 당시의 어떤 특정 지역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그대로 얻어먹은 것이다. 나중에는 존경과 공경의 대상이 되어 공양(供養)을 받는 입장이 되었지만, 먹는 음식은 지역 사람들이 먹는 음식 위주였으며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보통 일상의 음식을 그대로 걸식하여 먹었다. 하루에 한번 아침에 걸식을 해서 공양 대접을 받은 것이다. 
 

차츰차츰 출가사문들이 먹는 음식은 채식위주의 정갈한 음식을 먹게 되고, 육식은 금하게 되었다. 유정무정(有情無情)이 다 만물함령(萬物含靈)이라는 영성(靈性)을 인정하여 한 포기의 풀에도 생명이 있다고 보고, 최소한의 육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다는 음식관을 갖게 되었다. 
 

중국에 불교가 소개되면서 처음에는 왕실에서 신봉하게 되었고, 출가 승려들도 다소 영양가 풍부한 화려한 음식을 먹기는 했지만, 점점 식단이 변화해 갔다. 여러 지역 마다 음식이 달라서 처음에는 승가공동체인 사찰에서도 지역에 따라서 다른 종류의 음식을 섭취했지만, 채식위주의 음식으로 체계화되면서 사찰음식이 생겨나게 됐다. 
 

중국선종불교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정신에 입각해서 선(명상)과 노동을 병행해서 수련했다. 선(禪)이란 주로 앉아서 좌선(坐禪)을 하는데, 선종불교에서는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黙動靜)이 다 참선이라고 보고, 일도 참선공부라고 생각하면서 명상과 노동을 일치시켜서 수행하는 풍토가 조성됐다. 
 

그래서 중국 선종의 유명한 백장(720~814) 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하라’는 대원칙을 세워서 사찰에서 생활하는 모든 승려들에게 이른바 백장청규(百丈淸規)란 계율을 제정하여 실천해 옮기도록 했다. 
 

물론 당시의 승려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기는 했겠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 규칙이었던 것 같다. 
 

먹기만 하고 운동은 전연 하지 않는다면 몸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나라 사찰에서도 이처럼 백장청규의 전통을 계승했고, 특히 조선 시대에는 대부분의 산중에 있는 사찰만이 존속하게 됐고, 대부분의 승려 들은 한양성(漢陽城) 출입뿐 아니라 도성(都城) 출입을 금지당하다보니 산중 사찰에서만 살게 됐고, 이른바 지금과 같은 사찰음식으로 정형화 된 것이다. 
 

지금의 한국사찰음식은 고려말기부터 전 조선시대와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전통 음식이 그대로 보존되면서 전승되어 온 것이다. 우리의 모든 전통문화가 파괴되고 사라졌으나, 사찰음식처럼 우리 고유의 음식문화 특히 사찰에서 계절에 따른 식재료를 사용하여 채식이나 버섯 콩류 등을 사용한 조리법에 의한 음식이 사찰에서만 보존 계승되어 오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사찰음식은 수행자들이 주림을 달래고 최소한의 육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 밥상이지, 이것저것 영양가 있는 음식 위주로 배불리 먹자고 한 식단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찰음식도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의 영양가 있는 보양식(保養食) 식단이 생겨나게 됐다. 
 

사찰음식이 뜨게 된 것은 살이 찌지 않고 소화가 잘 되고 정신을 맑게 해준다는 점에 착안하여 일반인들에게 어필되었는데, 근래에는 너무 영양가가 많은 고급 사찰음식으로 변질되어서 본래의 의미와는 거리가 먼 사찰음식이 되어가고 있는데, 경계해야 할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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