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업계 전문성 강화위해 노력… 최근 식약청 기술자문관으로
3~4평 남짓한 자그마한 연구실은 온통 책과 자료로 뒤덮여 있었다.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진동하는 실험실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연구실에서 PC모니터와 책상위에 놓인 자료를 번갈아 뒤적이고 있는 이철호 교수(57·고려대학교 생명공학원)는 '영국풍 신사'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짙은 감색 싱글 정장에 엷은 잿빛 반조끼로 붉은색 계열의 넥타이를 감싼 의상, 다소 날카로운 눈매를 미소속에서 중화시키고 있는 모습은 동안(童顔)이라는 느낌과 함께 어우러져 젠틀맨(gentleman)의 풍모를 만들어냈다. 이 교수는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 부터 식품기술자문관으로 위촉받았다. 이는 각종 위원회위원에서 부터 연구소소장에 이르기 까지 이 교수가 갖고 있는 다양한 직함중의 하나가 추가될 뿐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식품기술자문관의 역할이 국내에서 유통되는 식의약품의 품질관리 지도와 단속 예방을 담당하고 있는 식약청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것이기에 주변의 관심이 적지 않은 게 사실. 이 교수는 대학시절 공부하던 과정에서 부터 현안에 대한 생각에 이르기 까지 자신이 담고있는 다양한 기억과 생각을 웃음과 위트를 섞어 쏟아내 인터뷰를 시종일관 즐겁게 만들었다. |
![]() | 이철호 교수(사진)는 식약청 등 식품관련 관리감독 기관이 최고수준의 역량을 지닌 두뇌집단으로 발전한 것은 국내 식품산업 발전을 위해 큰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했다. 사진 이종건 기자 |
이 교수는 지난 88년 이후 식품위생심의위원으로 일하면서 국내 식품산업의 발전과 관리감독기관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 애써 왔다. 이번에 식약청 식품기술자문관직을 맡게 된 것도 현장 관리감독기관의 전문성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이 교수는 “직원들이 부담없이 다가와 자문을 구하는 과정에서 한식구라는 생각을 갖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어 “식약청이 탄생하면서 식품안전과 관리업무를 수행하는 두뇌집단이 형성된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며 “이젠 100여명의 석박사급 두뇌들이 식약청을 비롯한 전문기관에 투입되면서 우리나라의 식품안전관리 역량이 세계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FDA에 버금가는 수준에 이르게 됐다”고 평가했다.
식약청 역량 세계적 수준
그는 “식중독을 비롯한 식품관련 사건들이 발생할 때 마다 매번 학계의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청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세계동향 등을 파악해 사전예방에 나서는 등 세계적 수준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며 “과거 햄버거와 관련한 문제로 인해 미국과 무역마찰이 발생했을 때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전문가들이 식약청의 근거제시와 상이한 음식문화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입을 다물었을 정도”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학계와 식품업계의 현안에 대해 “분석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 검출되지 않았던 위해성 물질들이 발견되고 있다”며 “완벽하게 안전한 식품은 사실상 존재하기 어려운 만큼 인체에 적합토록 적정하게 섞어내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현재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향후 기술적 진보에 따라 위해성 제품으로 판정될 수 있는 각종 화학물질을 이용한 포장지 등 잠재적 위해환경 물질이 늘어나는 것도 관심있게 지켜볼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을 신뢰, 추진력 있어
이 교수의 걸어온 이력 만큼 가꿔온 인성도 궁금했다.
“다가오는 모든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이 교수는 ‘자신의 성격을 직접 정리해 달라’는 기자의 다소 짖굳은 질문에 “무슨 말을 들으면 그 이면을 계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결코 귀가 얇다는 뜻은 아니다. 말이나 행동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 경우라는 전제조건이 붙는 경우에 한해서다. 학자로서 오랜기간 연구에 몰입해 왔던 이력은 합리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 언행은 자연스럽게 걸러낼 수 있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 교수는 “연구, 강의, 학술대회, 각종 자문 등 신경 쓸 일이 산적해 있는데 사람의 말에 대해 이면을 계산할 시간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이러니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다. 최소한 인간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소소한 고민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교수의 이같은 성격은 추진력으로 전이된다. 액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격이 해야 할 일에 대해 강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세계학술대회 보람 커
지난 99년~2001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IUFoST 제11차 세계식품과학학술대회의 사무총장을 맡아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낼 수 있었던 것도 이 교수의 추진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IUFoST 세계식품과학학술대회는 자타가 인정하는 식품과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학술대회.
이 교수는 “갑자기 기존 사무총장이 사의를 표명하고 자신에게 중책이 맡겨졌었다”며 “행사에 필요한 10억원을 넘어선 13억원을 만들어 낸 것에서 부터 행사진행을 무난히 챙길 수 있었던 것은 추진력이 뒷받침 돼 가능했다”고 자평했다.
나아가 이 교수가 학술대회 당시 세계적인 석학들에게 한국의 식품기술을 소개하기 위해 준비한 저서 ‘한국의 발효기술(Fermentation Technology in Korea)’은 세계 식품학계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교수는 “학술대회 오프닝 맨트를 통해 내 책과 내용이 호평 속에 소개 될 때 한 없는 기쁨을 느꼈다"며 “마치 그 동안의 모든 공부와 연구과정이 당시 학술대회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준비했고 그만큼 보람도 컸다”고 회상했다.
당시 이 교수가 소개한 한국의 발효기술은 여전히 세계 학계에서 이슈가 되고 있다. 오는 7월 시카고에서 열리는 12차 세계식품과학학술대회를 앞두고 최근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포럼에서 이 교수가 발표한 발효기술이 주요의제중의 하나로 채택돼 열띤 토론이 진행되고 있는 것.
이 교수의 전공은 식품저장학이다. 학부에서는 농화학을 전공했으나 대학시절 절대식량 부족으로 고민하던 시대상황이 그의 진로를 수정했다. 이 교수는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 단위면적당 재배량이 많고 열량이 풍부한 고구마 재배를 권장했으나 취약한 유통구조 때문에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까웠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역 앞에 쌓아놓은 고구마가 대책없이 썩고 있는 광경 등 당시 자주 나섰던 무전여행 과정에서 식품의 유통구조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직접 목격했다는 것.
R.O.T.C(포병) 제대후 국비장학생 시험에 합격, 덴마크 몰링(Malling) 농업학교로 유학한 그는 덴마크 왕립농과대학에서 식품저장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느 연수생들과는 달리 농업학교 수료후 왕립농과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교수의 집념과 언어구사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교수는 “코펜하겐에 있는 왕립농과대학을 찾아가 공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더니 학교 관계자들이 ‘덴마크어를 언제 그렇게 배웠냐’며 놀라는 모습이었다”고 술회했다.
농업학교 시절 2개월여의 방학 동안에 이뤄지는 농가실습 기간 중 현지 주민과의 커피타임을 십분활용, 생생한 덴마크어를 익혔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는 문제가 발생했을 당시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해결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세간에 관심을 모았던 저서 ‘식품위생사건 백서’도 각종 사건의 전모를 밝혀 과학적 지식과 전문가적 안목에서 이를 재평가, 식품산업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작은 노력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실습나간 농가 가족에게 현지어 배워 귈링씨 가족 한국초청 정을 나누기도 결혼도 덴마크에서… 그곳은 마음의 고향 이철호 교수에게 덴마크는 ‘마음의 안식처’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국비장학생 신분으로 처음 유학한 곳이 덴마크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그 곳에는 농군으로 땅을 일구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그를 받아주었던 평생의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수도 코펜하겐에서 한참 떨어진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귈링(Gylling Kristen Larsen)씨 부부와 그 자손들이 그들이다. 이 교수와 귈링씨 부부와의 인연은 지난 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업학교 과정의 하나로 두달여간의 방학기간중 현장실습을 나간 곳이 귈링씨 집이었다. 새벽 5시에 기상해 일하고, 점심먹고 또 일하고 저녁에 들어와 식사하고…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이 교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육체적 고단함 보다도 두 시간에 이르는 가족간 커피타임이었다. 커피타임은 서로의 일상과 관심사를 주고받은 가운데 가족간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유럽문화의 하나. 그러나 덴마크어에 능숙치 않은 이 교수는 이 시간에 답답한 벙어리 신세일 수밖에 없었다. 이 교수는 작심하고 귈링씨 가족에게 덴마크어 교습을 받기로 했다. 매일 일상언어를 물었고 이를 숙지하기 시작했다. 또 귈링씨 가족은 일부러 이 교수가 익힌 어휘와 문장을 중심으로 대화를 유도, 이교수의 언어습득 능력을 배가시켰다. 덴마크 농가로 실습나갔던 이교수로서는 최고의 가정교사를 얻은 셈. 이 교수는 “최소한의 언어는 익혀두고 있었지만 당시 귈링씨 가족 덕분에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덴마크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때 익힌 덴마크어 구사능력 덕분에 왕립농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으니 귈링씨 가족은 이교수에게 평생의 은인이 아닐 수 없다. 이 교수는 지난 88년 올림픽 기간에 귈링씨 내외와 아들, 딸, 사위를 한국에 초청했다. 침대생활을 하는 그들을 위해 방배동에서 침대를 구입, 내부개조(?)를 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한국방문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귈링씨 가족이 공회당을 순회하면서 한국방문기를 자랑스럽게 설파했다는 후문을 듣고 흐뭇했다”며 웃었다. 이어 “결혼 전 편지로 왕래하던 지금의 와이프를 코펜하겐으로 불러 결혼식까지 했으니 덴마크는 제2의 고향일 수 밖에 없지요”라고 덧붙였다. 지금도 이교수는 귈링씨 가족과 매년 크리스마스 카드를 교환하는 등 따뜻한 정을 교환하고 있다. |
학력 및 경력 |
1945. 8. 18. 함흥 출생
1967. 고려대학교 농화학과(농학사)
1967.~1969. R.O.T.C 포병학교 (예비역 중위)
1971. 덴마크 Malling 농업학교 (Diploma)
1975. 덴마크 왕립농과대학 식품저장학교실 (농학박사)
1975.~1979. 미국 M.I.T. 공과대학 연구원
1979.~1996. 고려대학교 식품공학과 교수
1996.~ 고려대학교 생명공학원 교수
1989.~1990. 덴마크 공과대학 생명공학과 객원교수
1994. 2.~7. 미국 Smithsonian Institution 객원연구원
1998. 2.~7. 일본 경도대학 식량과학연구소 객원교수
1999.~2001. IUFoST 제11차 세계식품과학술대회 사무총장
1988.~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청 식품위생심의위원
1998.~2001. 고려대학교 부설 식품가공핵심기술연구센터 소장
1999.~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2000.~ 국무조정실 식품안전관리대책실무협의회 위원
2001.~ 감사원 환경문화감사 자문위원
199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우수논문상 수상
1998. 국민훈장 석류장 서훈
2001. 한국식품과학회 공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