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 박종웅 국회 보건복지 위원장

  • 등록 2003.02.14 14:4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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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부터 몸에 배인 강직한 원칙주의자

소신관철 위한 용기와 소박한 인간미 돋보이는 행동가

언론탄압에 맞선 삭발항거를 비롯한 정부정책에 대한 직설적 비판 등으로 인해 박종웅 의원(한나라당·49)은 대체로 강직하고 선굵은 행보를 보이는 정치인으로만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박의원 주변에서는 그에 대해 ‘소신이 관철되지 않을 때 몹시 자존심이 상해하는…’ ‘이거다 싶을 때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라고 말하면서도 ‘힘든 상황을 헤쳐나가는 대단한 용기를 가진.…’ ‘소박한 인간미와 의리를 지닌…’이라는 인물평을 덧붙인다.

주변으로부터 소탈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박종웅 위원장은 힘든 상황을 접할 때 마다 과거 함께 했던 선후배들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사진 이종건 기자



국회와 정치권 주변에서는 박의원의 소신있는 정치행보에 대해 “10.26사건, 12.12사태, 5.17광주민주화운동, 4대에 걸친 대통령선거 등 70년대 이후 진행된 굵직굵직한 사건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던 데에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민주화과정에서 나타난 군사정권 교체와 통일환경의 변화 등 격변하는 상황의 주변부가 아닌 중심부에 발을 딛고 서있었다는 사실은 박의원에게 ‘원칙만이 정도’라는 신념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라는 것.
‘신은 우연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연히 맞닥뜨린 사건도 시간이 흐른 후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음을 알게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고백할 때 가능하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박의원이 그랬다. 지난 71년 가을빛이 완연했을 어느날. 학교는 서울대를 다녔지만 하숙집이 고려대 근처에 있어 고대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던 박의원은 이날도 여느 때 처럼 고대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안으로 밀어닥친 탱크는 정문을 막아버렸고 박의원에게 호된 성인식(?)을 치르게 했다.

총검으로 무장한 살기등등한 군인들이 학생들을 내몰았고 박의원을 비롯한 학교안에 있던 학생들은 군인들이 몰아치는 대로 엉금엉금 기어나와 군용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옮겨졌다.

돌멩이가 아닌 책을 들고 있다 끌려간 이날은 암흑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위수령이 선포된 날이었다.

대학 1학년을 위수령 선포에 따른 휴교라는 깜깜한 상황으로 시작한 사실은 박의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한 우연이었다.
그리고 비단 박의원만이 접한 특별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나 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고 평가되는 70년대 초반에 시작한 대학1학년으로서의 경험은 박의원의 내면속에 자리잡은 반골기질을 감안할 때 필연으로 보여진다.

경남고 2학년 재학시절 3선개헌 반대데모를 주도하다 무기정학을 받았고 대입시험 준비에 한창일 시점에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상황을 고민하며 이른바 이념서클인 한사연(한국사회연구회)에 가입해 사회과학에 몰두한 이력을 감안할 때 박의원은 어두운 시기에 접하게 될 많은 사건들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신체제 속 대학생활
위수령 발동 이후 이어진 72년 유신체제의 시작은 박의원에게 혼란과 함께 ‘행동하는 소신’을 강요한다.

강의실에서는 자연법 사상에 입각한 헌법을 배우고 인권은 천부의 권리라는 원칙을 논하고 있었으나 강의실 밖 현실을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과 독재체재, 그리고 무자비한 탄압과 극에 달한 부정부패 등 모든 정치 사회 현실은 그를 강의실 속에 안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장 존엄해야 할 헌법도 유신헌법 앞에서 철저히 유린당했고 사회발전을 담보해야 할 법질서도 유신앞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박의원은 당시를 “다시는 헌법책을 펴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회상한다.
그는 “당시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때 였고 학생회 학회 어느 것 하나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무겁고 버거운 현실은 장기화 할 가능성이 높아보였고 따라서 이를 개선하는 방식도 냉철한 판단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 박의원은 다양한 현장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조직화에 나선다.

본격적인 민주화투쟁을 위한 준비작업을 시작한 것.

대외적으로는 학회를 중심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 후배를 이끌어 학회를 양적 질적으로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여타 학회와도 유대관계를 넓히면서 현장활동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이론무장과 논리정립 차원에서 사회과학 공부를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일본어 공부를 시작, 원서독파에 밤을 새우기도 했다.

조직을 움직이면서 만나는 힘든 과정은 정의실현이라는 대의와 젊음이 있어 넘어갈수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 맺혀있는 허전함은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박의원은 지금도 대학졸업식이 있었던 날을 가끔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는 “일신보다는 사회와 국민을 생각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대학시절을 보냈지만 솔직히 졸업식 날 허망한 기분을 느꼈다”며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암울한 상황, 구멍 뚫린 것 같은 마음을 껴안고 교정을 걸어나오는데 돌뿌리 하나가 발에 걸렸던 것 같다”고 기억을 더듬는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한다며 고향에서 올라오신 부모님에 정말 미안했을 것이고, 명문대 법대에 입학했다고 좋아하셨고 큰 기대를 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현실이 아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박의원은 “대학4년이 무엇을 주었나 깊은 생각도 해봤지만 다시 대학에 입학한다고 해도 당시와 같은 상황이라면 별로 달라지지 않는 생활을 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힘든 캠퍼스 시절에 만났던 후배들과 함께 키웠던 경제법학회가 지금도 영향력 있는 학회로 활약하고 있는 것도 자신의 대학시절을 회한보다는 보람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게 박의원의 설명이다.

해군 중위로 전역한 이후 정치권에 발을 디딘 박의원은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공보비서관과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지내면서 언론과 국민에 이름과 얼굴을 알리게 된다. 톱리더의 지근 거리에서 최고정책의 흐름이 어떻게 시작되고 이어지는가를 보면서 정치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힌다.

이어 93년 14대 부산 사하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문화체육공보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국가경쟁력특별위원회, 한일의원연맹21세기위원회, 여성특별위원회, 운영위원회, 보건복지위원회 등 다양한 위원회 활동을 통해 국정전반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함께 했던 선후배가 큰 힘
그러나 박의원을 정치인으로서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소신과 강직, 그리고 의리라는 게 주변의 평가다. 언론개혁을 위해 언론권력에 맞서 당당히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는가 하면, 반대로 정권에 의해 언론이 부당한 탄압을 받고 있다는 판단됐을 때에는 삭발단식 투쟁까지 강행하며 정권에 맞서 언론을 감싸기도 했다. 일견 어패가 있어 보일 수도 있으나 언론을 똑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언론개혁의 방식도 정상적이어야 한다는 소신에서 비롯됐음직하다.

박의원은 “힘들 때마다 정의를 위해 그간 고귀한 생명까지 바친 많은 선후배를 생각한다”며 “역경에 처할때 마다 새롭게 일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것은 학창시절 순수하고 결연했던 각오와 국민들의 함성이다”고 말했다.

박의원은 최근 국내외적으로 핫이슈가 되고 있는 북한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소장파 국회의원 40명으로 구성된 '국회통일대비의원연구모임'을 결성, 지난 96년 북한접경지역과 중국을 방문할 것을 비롯해 98년에는 동구권 국가들의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분단국가의 정치인으로서 나아가야할 길을 모색해왔다.

아울러 한반도 주변정세와 통일문제, 북한체제의 변화가능성 등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물론 한반도 접경지역의 개발방안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를 찾아가는 등 미래 통일한국의 리더로서의 준비작업에도 적지않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변에서 말하는 박 의원


소탈하고 친절한 사람
체득된 검소함도 돋보여


“무척 소탈하고 솔직하세요. 직원들에게는 친절하고요” 박종웅 의원과 함께 근 10여년을 함께 일했다는 강모씨는 주변에서 강의원을 인식할 때 그저 강직하고 차갑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한다. 언론을 통해 비쳐진 모습이 정치적 사안과 연결돼 있어 자기주장이 강하고 소신을 관철하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일단만으로 평가되는 것 같다는 것.

그는 “박의원의 인간적인 따뜻한 측면은 직접 만나보면 쉽게 알 수 있다”며 “무엇보다 검소하고 소박한 모습에서 친근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가끔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회식할 때 순대를 즐기는데 소줏잔을 넘기며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쉽게 자신과 매우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준다“고 평했다.

박의원을 자주 접하는 기자들 사이에서는 그를 뉴스메이커의 한 사람으로 뿐만아니라 유쾌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소신이 강하고 정치적 사안에 정면돌파하는 스타일로 인해 뉴스감을 제공하는 명쾌한 측면도 있지만 뱉은 말은 명료한 팩트(fact)로 인식을 심어준다는 것.

성장과정에서 체득한 검소의 미덕을 실천하는 것도 오랫동안 만났던 박의원을 만났던 사람들은 그의 장점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특히 최근 주변의 빈번한 당적이적 사례로 인해 부각되고 있는 이른바 철새정치인에 비판이 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박의원의 ‘의리 정치’는 후광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한나라당 P의원은 “여론의 질타 속에서 나타난 상도동의 힘겨운 상황에서도 그를 정치적으로 성장시켰던 김영삼 전대통령을 보좌하는 것도 긍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 주변사람들에게 박의원의 정치적인 면을 제외한 인간적 측면을 짧게 요약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대부분은 ‘소탈’과 ‘합리적 정(情)’을 얘기했다. 소탈을 검소한 습관에서 비롯됐고 합리적 정은 속깊이 냉철한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학력 및 경력

1953. 8. 9. 부산시 서구 암남동 출생
1968. 2. 경남중 졸업
1971. 2. 경남고 졸업
1975. 2.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1978. 8. 해군중위 제대
1986. 5.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공보비서관
1993. 2. 청와대 민정비서관
1993. 4. 14대 국회의원 당선(부산 사하구)
1996. 4. 15대 국회의원 당선(부산 사하을)
1994. 6. 부산발전연구원 이사(현)
2000. 4. 제16대 국회의원 당선(부산 사하을)
2002. 7. 국회 보건복지위원장(현)

주요당직

1995. 2. 민자당 민주자유청연봉사단(민청) 총단장
1996. 5. 신한국당 홍보위원장
1997. 3. 신한국당 기회조정위원장
1998. 2. 한나라당 정치구조개혁특위 정당/선거소위 위원장
1998. 4. 한나라당 사무부총장
1999. 2. 한나라당 당무위원
푸드투데이 김관오 기자 gokim@f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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