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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결의 페스티벌(56) - 6.25전쟁이 아닌 '6.25사변'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북한 괴뢰군은 러시아(구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무력화시키며 대한민국을 침략해왔다. 분명한 북한군의 선전 포고없는 남침, 6.25사변 이었다.

6월 26일 옹진반도의 한국군 17연대가 철수하였고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의정부가 북한군에게 함락되었다. 27일 북한군의 전차부대 일부가 서울 시내를 장악함으로써, 정부는 대전으로 퇴각하였다. 이어 한강 이북의 한국군이 전원 철수하고 28일 새벽 3시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자 28일 서울은 북한군에게 완전 함락되었다. 

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미국은 25일 상임이사국의 하나인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 로 규정하고 북한군의 즉각 철퇴 촉구를 결의케 하는 한편 유엔회원국들에게 남한에 원조를 제공할 것을 결의 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즉각 철퇴를 요구하는 유엔의 요청을 묵살한 채 전쟁을 계속 하였고, 6월27일 미국대통령 H.S. 트루먼은 한반도의 전쟁이 타이완 등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 제7함대를 급파, 중국의 움직임을 견제하면서 미국의 해·공군을 파견하여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6월 28일 미국 극동군사령관인 D. 맥아더 원수가 미국 국방성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하자 트루먼대통령은 6월 30일 지상군 투입을 명령하였고, 7월 7일에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그 관할권을 미국에게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맥아더가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북한군이 대전을 점령한 뒤, 호남 및 경상북도 왜관·영천·포항 등지로 나누어 남진해 오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8월 중순부터 시작한 북한군의 총공세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유엔군의 증원부대가 계속 도착하여 총반격을 시작했다. 

7월 15일부터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안을 구상, 낙동강전선에서 총반격을 시작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미국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단 및 5000명에 달하는 한국해병대가 9월 15일 새벽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 다음날 인천을 탈환하였으며 26일 서울로 진입하여, 28일에는 빼앗긴 지 3개월 만에 서울을 수복하였다.
 
그동안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한국군 제1군단은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하였고, 26일에는 미국 제10군단이 상륙하여 한국군을 지원하였다. 그 결과 평양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렀고,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여 국토의 전역이 거의 수복되고 통일이 실현되는 듯 했으나 결국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10월 24일 드디어 한국군 제6사단이 청천강 상류에 있는 운산에서 중국군으로 보이는 적군에 포위되었고, 이를 구출하기 위한 미국 제1기병사단마저도 26일에 포위되어 고전하였다. 12월 4일 맥아더는 중국군 100만이 북한에 투입되었으며,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고 발표하였다. 

북한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재점령하였고 남한정부와 민간인들은 다시 피란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1·4후퇴이다. 

맥아더는 중국 공업지대 폭격을 포함한 4개 항목에 달하는 전면적 대응을 계속 주장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았다. 1951년 1월 25일부터 유엔군은 반격을 재개하여 2월 10일 인천과 김포를 탈환하였고 3월 24일에는 38선을 다시 돌파하였다. 이때 맥아더는 중국 북동부인 만주지방을 폭격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미국정부는 휴전을 모색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1951년 4월 23일 김화 남방의 유엔군방위선을 집중적으로 공격, 돌파하여 28일에 춘천, 30일에 서울 우이동까지 진격하였으나 결국 격퇴되었고, 또 5월 16일 인제 지구에 침투하였으나 격퇴 당하였다. 

한국군은 서부전선에서 6월 3일 연천지구로 진격하고, 중부전선에서는 6일 처음으로 평강에서 대치하여 철원과 김화를 점령하였으며, 동부는 5월 30일에 고성까지 진격해 있었다. 이에 북한군은 전세가 불리해졌다는 것을 알고 6월 23일 유엔주재 소련대표인 Y.A. 말리크를 통해 한국전쟁의 정전을 제의해왔다. 

1953년 3월 5일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송환을 희망하지 않는 포로를 중립국에 맡겨, 그들의 귀국문제를 정당하게 해결하자는 새로운 제의를 하였다. 4월 11일 상병포로교환협정이 성립, 협정각서가 교환 되었으며, 마침내 양측은 현재의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각각 2㎞씩 비무장지대를 설정하기로 합의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서명됨으로써 3년 1개월에 걸친 승패없는 전쟁은 끝이 났다.

북에 의한 ‘6,25남침전쟁’은 이른바 ‘잊혀진 전쟁’ 되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6.25’는 절대 ‘잊혀진 전쟁’이 되어서는 안된다. 항상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교훈들을 후세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요즈음 6.25전쟁 또는 한국전쟁으로 불려지면 안될 6.25사변이 뜻하는 것은 북한이 남한을 선전 포고없이 기습적으로 침략했다는 의미로, 전쟁의 가해자는 북한, 피해자는 남한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겠다는 표현이다. 

여러 방송, 언론 매체에서 6.25전쟁, 한국전쟁이라고 부르고 있긴 하지만 동족상쟁 의 비극을 일으킨 김일성이 용서받지 못하는 한 6.25사변, 아니면 "6.25남침전쟁"으로 부르는게 정확한 명칭이다. 
 
우리는 6월,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조국을 위해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헌신과 희생정신을 되새겨 보고, 분명한 북한군의 선전 포고없는 남침, 6.25사변의 쓰라린 교훈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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