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송결의 페스티벌(40) - 삼일절 대한독립만세

2013년 3월1일은 제94주년 삼일절이다.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기미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의거이다. 기미독립운동 또는 3·1 인민봉기라고도 부른다.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원칙에 따라 진행하려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한민족 독립운동 이었다.

‘손병희’ ‘한용운’ ‘이승훈’ 등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한 이 만세 운동은 만세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 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대표 48인 또는 스코필드를 포함 민족대표 49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섰다. 

삼일절 하면 가장먼저 생각나는 인물이 유관순열사이다. 유열사는 1902년 3월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918년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삼일운동 서울시위에 참여하고 학교가 휴학하자 병천으로 내려와 천안청주 등 충청지방의 교회와 유림 대표자들과 협의 하여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왜경에게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으나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형으로 늘어났다. 교도소 에서도 시위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기도 하여 혹독한 고문에 신음하다가 18살의 어린 나이에 옥사하였다.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일정때의 도시계획에 의해 무덤이 전해지지 않는다. 아우네 독립운동 사적지는 유관순열사가 3.1 운동 때 시위를 했던 곳이다. 

1919년 3월 1일 을 전후한 서울 등 주요도시의 만세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강릉에서는 초당리 청년 ‘최돈옥’이 탑골공원의 독립선언 식장에 참여하고 돌아온 즉시 창동회(昌動會)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대체로 강릉지방의 3.1운동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 후인 4월 2일과 4일·5일·7일·8일 등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최소한 6회 이상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개성에서는 당시 여자성경학원 기숙사 사감을 지내던 어윤희 선생이 조선독립선언서 80매를 받아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경 개성시내에서 옷 속에 숨겨간 독립선언서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조선독립선언서' 임을 알리고, 서울의 3.1만세운동을 전하며 개성 3.1운동 발발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어윤희 선생은 1881년 충북 충주군 소태면 덕은리 에서 태어나 1894년에 결혼하였지만 동학군인 남편이 전사하자, 경기도 개성에 정착하여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정춘수’의 설교에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1919년 4월 11일 보안법위반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서도 유관순 등 옥중의 동지들과 함께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투쟁 감행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윤희 선생은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배포활동 및 개성지역 3.1운동을 촉발시켰던 3.1운동의 주역이었다. 

그 외에 1919년 3월 4일 평남 대동군 강서면 사천장터에서 약 3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시위를 벌인 사천장터시위에서는 3·1 운동 최초의 사망자가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과 안주에서 발생한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유혈 사태였다.

삼진 의거는 1919년 3월28일, 4월3일 등 두번에 걸쳐 전개된 경상남도 창원 일대의 연합 대시위였다.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한 뒤 연고지에 돌아온 ‘변상태’가 진전, 진북, 진동면의 3개면에서 동조하는 인사들을 모아 모의한 의거였다.

익산 이리장날 만세운동은 기독교인이었던 군산 영명학교 교사 ‘문용기’가 1919년 4월 4일 이리 장날을 이용하여 봉기한 독립운동 이다.

군산 3·5만세운동은 전북 군산에서 영명학교 졸업생 ‘김병수’가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이던 이갑성과 접촉하여 독립선언서 200여장을 건네받고 주도한 만세운동이다.

만주지역에서의 대표적인 만세시위는 만주 용정 만세운동이다. 3월 13일 용정에서 3만여명이 참가한 대단한 시위였다. 

일제는 전국적인 만세봉기가 끊이지 않자 잔혹한 학살을 벌이며 시위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3일 평안남도 사천학살사건, 1919년 3월 6일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학살사건, 4월 15일 경기도 수원 향남면 제암리 장터학살사건, 등 수많은 악행을 자행했다.

1919년 4월 3일 시위군중이 화수리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일본 순사 1명을 타살하자 11일 새벽에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 민가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마을 주민 수십여명을 학살한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 학살사건.

평안남도 맹산에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이들을 분견소 안마당에 끌어들인 뒤 문을 잠그고 60여명을 총살한 맹산 학살 사건과 일본군에게 113명이 총살되었고, 87명이 부상당한 대구 학살 사건. 

그리고 1919년3월 16일 경남 합천군 야로면에서 주민들과 해인사의 승려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는데, 그 참가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 일본군의 발포로 3명이 죽고 다수가 부상한 합천 학살 사건, 

남원군 덕과면장 이었던 이석기가 4월 3일을 기해 만세시위를 벌인 남원 학살 사건에서는 8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매년 3월 1일 거행하는 삼일절은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 단결을 굳게 하며,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해 제정된 4대국경일중 하나이다. 

삼일운동은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여 힘차게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으로 우리는 엄청난 인명과 물질적 피해를 보았다. 전국 각지에서 1542회의 시위가 일어났으며 참가 인원은 202만 2089명에 이르렀다. 그래서 사망자가 7509명, 부상자가 1만 5961, 검거자 5만 2,770명이나 발생했으며, 교회 47개, 학교 2개, 민가 715채가 불타 없어졌다. 그런데 이 통계는 일본측 발표에의한 것이니, 그 정확한 피해와 참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처럼 악행을 일삼은 일본이 아직도 침략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 지금도 고유의 한국 영토인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우기는 일본인들의 침략근성을 우리는 예의주시하여 전 국민이 한마음으로 그때의 참혹함을 되새겨야 할것이다. 수많은 국민들이 그들의 총칼앞에 희생되었다. 그 희생의 큰뜻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상기시켜 삼일운동의 고귀한 정신을 계승, 나라의 존귀함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관련기사

82건의 관련기사 더보기